“그동안 유용하게 사용했던 이 모형은 오늘부로 모두 없어집니다. 불가(佛家)에서 만다라를 만들고 완성되면 없애는 것과 같습니다.”
도선대사는 두툼한 책 한 권을 내놓았다. 겉면에 도선비기라고 적혀 있었다.
“저의 부친이신 량궁복(장보고)장군의 경우도 그러하였지만, 우리 천손(天孫) 량씨는 천성이 어질고 남을 쉽게 믿는 타고난 성질이 있습니다. 천하제일의 무장(武將)인 장보고장군께서 한낱 중국인 소금밀매꾼에 불과한 염장(閻長)에게 그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속된 말로 송사리에게 좆을 물렸다고 하지요. 제가 그동안 연구한 바에 의하면 고쿠리(高句麗)의 량씨는 원래 해(解)씨였습니다. 해모수(解慕漱)께서 탐라에서 홀연히 부여로 건너가시어 하백의 딸 유화낭자를 임신시키고 갑자기 사라지셨습니다. 이후 해모수께서는 남쪽 촐본을 거쳐 왜(倭)로 가셔서 최초의 천황(天皇)이 되셨습니다.”
“졸지에 임신 당하고 홀로 되신 유화낭자는 불행하게도 북부여 금와왕의 후궁이 되시는 와중에도 해추모(解鄒牟)를 나으셨고, 해추모(解鄒牟)께서는 고쿠리(高句麗)를 건국하여 태왕(太王)이 되셨습니다.
당나라 역사서에는 주몽(朱蒙)이라고 쓰여 있으나 이는 중국 역사서의 단점인 자신을 제외한 모든 민족을 오랑캐로 비하하는 나쁜 버릇의 발로입니다. 태왕(太王)의 이름에 무지(無知)할 몽(蒙)자를 쓸 리가 있겠습니까. 추모(鄒牟)가 맞고 이는 부여 말로 활을 잘 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해추모(解鄒牟) 태왕(太王)께서는 34세에 불한당 유리(瑠璃)의 계략에 걸려 참살 당하셨습니다.
이 후 해추모(解鄒牟) 태왕(太王)의 손자이신 무휼(無恤)께서 절치부심 끝에 유리(瑠璃)일당을 모두 척살(刺殺)하시고 태무진(大武神) 태왕(太王)이 되셨습니다.
무휼(無恤)이란 동정심이 없다 라는 뜻이니까,유리(瑠璃)일당에게서 구사일생으로 도망친 해추모(解鄒牟) 태왕(太王)의 유족들이 얼마나 복수를 염원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태무진(大武神) 태왕(太王)께서는 백전백승의, 말 그대로 대무신(大武神)으로써 고쿠리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키고 전쟁 때마다 혁혁한 무공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아들인 모본태왕(慕本太王)께서 한나라 요동태수를 크게 이기고 돌아오시는 길에, 기골이 장대한 거지아이가 길옆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시고 이를 측은하게 여겨 궁궐에 데려와서 치료해주고 길렀는데, 이 자가 장성하여 궁궐 내에 자기 세력을 규합하여 모본태왕(慕本太王)을 시해하고 자신이 고쿠리의 태왕이 되었습니다. 이 자가 태조태왕(太祖太王)으로 고쿠리 고씨(高氏)왕조의 시작입니다. 이 자는 자신을 구제해준 모본태왕(慕本太王)을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포악한 인물로 역사서에 기록하고 자신을 왕조의 시작인 태조태왕(太祖太王)으로 명명하고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왕조가 새로 시작됨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자가 영명하고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가 뛰어나서 결국 해씨(解氏)왕족들은 더 이상 대항하지 못하고 성을 량(梁)씨로 바꾸어 목숨만 부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잘 알고 있는 량만춘 안시성 성주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개소문에게 참살 당한 영류왕의 태자 등 고씨(高氏) 일족들을 모두 안전하게 거두고, 이들을 넘겨달라는 연개소문과 일전을 벌리시어 연개소문을 패퇴시키셨습니다.
당태종 이세민은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에서 알 수 있듯이 지극히 뛰어난 자입니다.
이 자는 전쟁을 시작하기 전 고쿠리 내부를 첩자를 무수히 사용하여 세밀하게 정탐하였는데, 량만춘 안시성주가 당시의 집권자인 연개소문을 전투에서 대패시키고 고쿠리 왕실을 보호하고 있는 것을 알고 사신을 보내 크게 치하하고 상을 내려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자 온갖 수단방법을 다 썼는데 량만춘 안시성주에게는 전혀 그 수단이 먹히지를 않았습니다.
그 뛰어난 황제인 당태종 이세민이 정병을 거느리고 고쿠리정벌에 직접 나섰으나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1,000장(약 3,000미터)너머에서 발사된 팔우노의 애기살에 왼쪽 눈을 잃고, 결국 패퇴하다 요택에서 매복에 걸려 생포되는 망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 당나라는 그간 잡아갔던 고쿠리 백성들 사십만을 돌려주고 간신히 이세민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량만춘(梁萬春) 안시성주께서는 실로 대단한 충신이며 명장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빈도가 지난 10여년 중에 깨달은 것은 어리석은 것 같은 선량하고 착한 기운이 사악하고 독한 것들을 결국은 이긴다는 것이었습니다.”
“탐라의 량씨는 천여 년 전 서쪽에서 태양이 뜨는 곳을 향하여 동쪽으로 동쪽으로 태양(太陽)과 밝음(明)을 숭상하는 무리를 이끌고 동진하다 성스러운 태양의 산 태백산(한라산)이 바다 한 가운데 우뚝 서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밝음(明)을 숭상하는 무리는 이후 성스러운 땅 탐라에는 <브라만 중의 브라만> 량씨만 남고 지금의 신라 땅으로 가서 6씨족이 되고, 왜국으로 가서 태양의 땅 일본(日本)이라 이름 짓고 정착하고, 전라도 남쪽 지방(지금의 나주지방)으로 가서 마한왕국을 세우고 촐본(卒本)이라 명명했습니다. 그곳이 지금의 무주(武州,전라남도) 금성(錦城)땅입니다.”
“천손(天孫) 량씨(梁氏)의 신화에 의하면 천상에서 태양과 달이 결혼을 하면 그 아들인 금성(金星)이 태어나 밝은 기운을 지상(地上)으로 보내 천손족(天孫族)을 탄생시킵니다. 이 지상의 금성을 촐본, 즉 새벽의 가장 빛나는 별의 땅이라고 부릅니다.”
“해추모(解鄒牟)태왕께서 처음 도읍하신 곳도 촐본이라고 이름 지으신 것도 이같은 내막이 있는 것입니다. 촐본이라는 말은 원래 파사국(波斯國,페르시아) 말입니다. 파사국에 배화교(拜火敎,조로아스터교)라는 밝음을 숭상하는 종교가 있는데 촐본 역시 파사국 말이니 먼 옛날 량씨가 무리를 이끌고 출발한 곳이 어딘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요.”
“아마 파사국에서 밝음의 믿음을 유지할 수 없는 큰 난리가 나서 수백 년 동안 여러 나라를 거치면서 동쪽으로 동쪽으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이동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후 탐라의 량씨 중 뛰어난 자는 계속 바다를 건너가 나라를 세웠고 탐라의 량씨와는 드물게나마 계속 연락을 해왔던 것입니다. 탐라의 량씨는 원래 태양을 뜻하는 해씨를 사용하다, 이후 음양(陰陽)의 이치를 도입하여 차음(遮音)인 량(良)를 사용하다 량(梁)를 사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도선대사는 한 달 동안 천손(天孫) 량씨(梁氏)의 역사와 도선비기의 심오한 내용을 알기 쉽게 가르쳤다.
공부가 석 달이 되는 마지막 날 도선대사는 금오 일행을 향해 마지막 당부를 하였다.
“석달 동안 고생이 많았습니다. 도선비기는 이제 세 시주의 머릿속에 있을 터이니 이 자리에서 불태워버리겠습니다.”
겉면에 도선비기(道詵祕記)라고 쓰여 있고, 그 옆에 옥룡자 량씨 씀(玉龍子 梁氏 書)이라고 쓰여 있었다.
화로 속에서 도선비기는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예로부터 세상에 내려오는 말에 『동사(東邪) 서독(西毒) 중금오(中金烏)』라는 말이 있습니다.신라가 기운을 잃고 멸망해갈 때 동쪽에서 사악한 자가 일어나고, 서쪽에서는 독을 품은 자가 일어나며, 이때 진인(眞人) 금오(金烏)가 이들을 제압하고 통일을 이룬다는 뜻입니다. 가운데 중(中)자는 중용이나 중도와 같이 올바른 진리를 뜻합니다.”
“십여 년 전의 일입니다. 빈도는 중금오(中金烏)에서 국토 중앙 상주의 금오산(金烏山)을 떠올리고 금오산 속 석굴 속에서 홀로 수행을 하며 지냈습니다. 항간에서는 이 굴을 도선굴이라고 부릅니다. 이때 빈도를 찾아온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상주 호족인 아자개(阿慈介)의 아들인데 자신을 견훤(甄萱)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질그릇 견(甄),원추리 훤(萱)을 써서 스스로 이름을 짓고 세상의 비참한 민초들을 위하여 양식을 담는 질그릇처럼, 궁핍한 자의 양식이 되는 원추리처럼 헌신하겠다고 다부지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아자개(阿慈介)는 원래 량(梁)씨인데, 지리산 아래 신라의 중요한 소경(小京,작은 서울)인 남원경(南原京)사람입니다.
여기에 살고 있는 량씨들은 150여 년 전 탐라의 용호아지발도였던 량우량(梁友諒)공의 후손들로 남원 량씨(南原 梁氏)로 불리지요.
150여 년 전 왜(倭)가 가야(伽倻)의 유민들과 연합하여 지리산 일대를 장악하고 막강한 세력으로 신라 수도 금성(金城)을 공격하려고 할 때, 신라 조정에서 파견한 군사는 연전연패하고 이에 당황한 신라조정에서는 누구든지 이 적도(敵徒)들을 진압하는 자는 지리산 일대를 모두 떼어주겠다고 공표하였습니다.
이때 량우량(梁友諒)공은 소수의 특공대를 이끌고 적의 사령탑에 진입하여 적의 수괴들을 모두 주살하고 가야의 유민들을 설득하여 난을 깨끗하게 진압하였던 것입니다.
신라조정에서는 이때를 계기로 해서 통치상 문제가 많던 지방조직을 새로 9주5소경으로 나누고 약속대로 초대 남원부백(南原府伯)으로 량우량공을 임명했습니다.
소경이란 신라의 작은 서울인데 그중에서도 옛 백제땅인 무주,전주(武州,全州-전라도) 전역을 총괄하는 중요한 자리를 진골귀족도 아니고 신라인도 아닌 외국인(탐라인)에게 어쩔 수 없이 내주었던 것입니다.
이후 량우량(梁友諒)공의 후손들은 이 자리를 잘 지켜 오늘날까지 지리산 아래 남원(南原) 일대를 량씨의 왕국으로 만들어 오고 있습니다.
아자개(阿慈介)는 이 남원(南原)에서 호랭이아지발도였던 자입니다.
지리산 아래 남원(南原)에서도 탐라와 같이 아지발도를 매해 선발하는데, 바다가 없어서 수달아지발도는 없고 육상의 3종목만 시행하고 있습니다.
호랭이(虎)아지발도는 이 세종목 모두를 석권한 자인데, 탐라에서는 각 성씨들의 특기가 달라서 호랭이아지발도가 드물게 나오지만 지리산 아래 남원(南原)에서는 5~6년마다 호랭이아지발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아자개(阿慈介)는 상주(尙州)지방에서 원종(元宗)과 애노(哀奴)의 민란이 일어났을 때 신라군이 대패하여 신라조정이 그 책임을 물어 신라군의 장군 영기를 참하고 대책이 없어 허둥지둥하고 있을 때, 남원(南原) 출신의 정예 수하들을 데리고 민란을 진압하고 상주성을 접수하고 이후 신라 10정(신라의 지방 군사조직) 중 상주에 주둔하고 있던 음리화정의 병력들을 모두 장악하여 지금도 상주의 주인으로 있습니다.
견훤은 아자개(阿慈介)의 큰아들이었으나 친모가 일찍 죽고 계모의 구박을 받으며 지내다가 빈도를 찾아 금오산의 도선굴로 왔던 것입니다.
견훤(甄萱)은 비범한 자입니다. 이미 그 힘과 지략은 당할 자가 없어 15~6세의 나이에도 수십 명의 심복들을 수하로 부리고 있었습니다.
빈도는 견훤(甄萱)이 중금오(中金烏)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여 당시 도선비기를 전수해주었습니다.
10여 년 전 도선비기는 지난 두 달간 시주님들께서 배웠던 땅의 이치와 전략전술에 대한 것인데, 당시에는 빈도가 신라에 대한 증오심이 강할 때라 견훤(甄萱)에게 이 도선비기를 충실히 익혀 꼭 신라를 멸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때에는 신라 금성(金城,서라벌)을 중심으로 내삼주(內三州,신라의 지방 9주 중 수도 근처의 주들)인 양주,상주,강주의 상세한 지형도와 전술적 이용방법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었습니다.
나중에 빈도가 신라를 멸하는 것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그 부분은 모두 태워버려 유감스럽게도 시주님들에게는 가르침을 드리지 못한 부분입니다.
이 견훤(甄萱)이 2~3년 전에 무주의 미다부리정 소장(小長)으로 가서 그위의 전주 거사물정까지 장악하여 백제의 부활을 선포하고 백제국 황제를 칭하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견훤(甄萱)은 서독(西毒) 즉 서쪽의 독기를 품은 자였습니다.
부디 량금오(梁金烏)께서는 동사(東邪,동쪽의 사악한 자)와 서독(西毒)을 모두 제압하시고 늙은 신라를 포용하여 삼한의 통일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아미타불.”
옥룡자(玉龍子) 도선대사는 석 달 간의 가르침을 모두 마치고 량금오(梁金烏)일행을 송악(松岳)으로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