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양씨 시조, 중시조 유래
남원 양씨는 양우량(梁友諒)을 시조로 한다. 양우량은 본래 제주 양씨였으나, 757년(신라 경덕왕 16) 공을 세워 남원부백에 봉해진 후 후손들이 양우량을 시조로 하고 남원을 본관으로 삼아 분적하였다고 한다.
남원양씨 중시조, 병부공파 1세 양능양(梁能讓)의 5세후손인 견(堅)이 광정대부에 올라 판밀직사사, 진현관 대제학을 역임하였고 堅의 5대후손인, 묵재공(梁祐-10세: 문과 학자/문양공의 증조부)은 고려말 충신으로 '두문72현', 동국(東國)의 백이 숙제(伯夷叔齊)라고 불렸으며 판도판서, 집현전대제학을 역임하였고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불참하고 남원에 蛟龍山에 은거하여 여생을 보냄. 양우의 墓는 남원시 송동면 송상리 산36번지(문현마을)에 개성의 崧陽書院, 杜門洞書院, 南原月谷書院에 위패를 모셔 묵재공(默齋公)의 학문과 충절을 기리고 있다.
남원군(梁九疇/용인 한터 유택)의 부친인 참판공(梁碩隆-11세)은 묵재공(梁祐)의 차남으로 士高文科에 급제, 판위위시사를 역임한 후 낙향하여, 여생을 마치고 남원시 송동면 송상리산23에 묻혔다. 문양공 양성지(梁誠之)의 장남인 참의공 瑗(원)은 조부인 梁九疇(남원군)의 유택이 있는 양지현감을 역임했다. 참의공 梁瑗(양원)과 그의 아들 삭령공 梁治(양치)와 신창공 梁濟(양제), 문양공의 4대손인 사헌부 감찰을 역임한 감찰공 梁思益(양사익)까지 4대가 진천에 묘소가 있다.
*문헌 참고
· 梁友諒(양우량) : 신라 경덕왕 16년(742 ~ 765) 남원 부백으로 임명되어 남원경을 다스림
· 梁能讓(양능양, 호 수암) : 고려 태조 왕건의 손자 왕림의 사위로 고려 성종 시 중봉대부 병부낭중을 역임. 고려 목종(980 ~ 1009) 때 김치양 일당의 불의와 전횡에 벼슬을 버리고 남원 중산동에 은거한 고려시대의 절의의 충신으로 용장서원 주벽(의인 4위)으로 위폐 봉안
문양공(梁誠之, 1415 ~ 1482) "민족 자존을 견지한 선비 눌재 양성지"
양성지는 조선초기 세종~성종대까지 활약한 학자이자 문신으로 본관은 남원, 자는 순부, 호는 눌재이다. 또한 스스로 호를 '송파'라 하기도 했다. 양성지는 1441년 진사시, 생원시에 합격, 이어 식년시에 급제하면서 관직에 오르게 된다. 벼슬은 문신으로서의 최고 영예직인 대제학(정2품으로 '문형'이라고도 함)에까지 올랐는데 우리가 양성지에 대해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다. 그것은 바로 양성지가 일관되게 조선의 자주성을 제고하고자 했고 또한 시종 이를 견지했던 것이다. 양성지가 살았던 15세기는 소위 명나라와 조선의 주종관계가 확립되어 가던 시기였다. 그러한 시대상황에서의 양성지의 행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1456년 6월 집현전이 폐지되면서 양성지는 세자좌보덕으로 옮기게 되는데 이때에 즈음하여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명나라에서 우리나라에 국서를 보낼 때 혹 왕이라 일컫기도 하고 경이라 일컫기도 하더니 문종대에 와서는 이여(爾汝:너)라고 부르니 통분스럽기 짝이 없다 명에 항의를 해야 한다." 명의 오만함을 서슴없이 성토한 것이다.
그리고 양성지의 저서 [눌재집] '논군도십이사'편에보면 민족주체성을 강조하는 취지의 방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몇가지를 언급해 보면
첫째,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고 우리의 역사에서 배우는 슬기를 지녀야 한다. "동방의 사람이 한갖 중국에 성(盛)한것이 있는 줄만 알고 동국(東國)의 일을 상고할줄 모르니 대단히 옳지 못하다. 바라건대 전조(고려)태조의 구민(求民)이나 성종의 정제(定制) 현종의 수성문종(守成文宗)의 양민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둘째, 우리의 주체적인 풍속을 보존해야 한다. "우리 동방은 대대로 요수의 동쪽에 살아 만리지국(萬里之國)이라 불리어졌다. 3면은 바다로 막혀져 있고 1면은 산을 짊어지고 있어 구역이 저절로 나뉘어지며 풍기도 또한 다르다. 단군이래 관청을 베풀고 고을도 두어 주체적인 교화의 덕을 폈다. 전조(고려)의 태조는 신서(信書)를 만들어 나라사람을 가르쳤고 의관과 언어는 모두 본래 지닌 풍속을 따랐다. 만약에 의관 언어가 중국과 다르지 않다면 민심이 안정되지 못할 것이다.
셋째, 문묘에 우리의 선현을 많이 배향해야 한다. "대개 우리나라에 기자(箕子)가 봉함을 받은 후로 홍범 유교가 오래도록 퇴색되지 않았다 당에서는 '군자지국'이라 했고 송에서는 '예의지방'이라 일컬었다. 문헌의 아름다움이 중화를 짝할 만한데도 문묘에 배식(配食)하는 자가 설총, 최치원, 고려의 안향 세 사람 뿐이다." (여기서 양성지는 최충, 이제현, 정몽주, 권근 등을 배향해야 한다고 주장함)
넷째, 국가의 체통을 세울 것을 건의하는데 중국과 마찬가지로 제천행사를 주관할것과 임금의 탄생일을 황제의 예로 "절(節)"로 할것 그리고 상신(相臣)을 우대하고 왕실에 존호를 올릴것을 주장 한다. 그리고 양성지는 자칫 문약(文弱)에 빠질것을 경계하고자 문무여일(文武如一) 정책을 주장했다. 문과 무를 똑같이 존중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양성지는 문묘와 마찬가지로 무묘를 세워 신라의 김유신, 고구려의 을지문덕, 고려의 유검필, 강한찬, 양규, 윤관, 조충, 김취려, 김경손, 박서, 김방경, 안우, 김득배, 이방실, 최영, 정지, 조선의 하경복, 최윤덕 등을 배향하자는 안을 내놓기도 한다.
병부공파(兵部公派)
남원양씨(南原梁氏) 병부공파(兵部公派) 기세조(起世祖) 둔암(遯菴) 휘(諱) 능양(能讓)은 관 중봉대부 병부랑중 동궁내 시강학사를 지낸 분으로 학문과 덕행이 특출하여 고려 성종조에 국왕을 보필하여 선정을 베풀고 동궁(東宮)을 교육하였으며, 목종(穆宗)조에는 왕명을 받들고 중국(당시 송나라)에 들어가 경학을 강논하고 귀국하여서는 학교를 세우고 영재교육에 전념하였으며 만년에는 국정이 혼탁하고 기강이 문란함을 개탄하고 남원(南原)에 은거하다가 세상을 마치니 후세(後世)의 사람들이 그 정충대절(精忠大節)을 기리고 서원(書院)을 세워 배향하였다.
그러나 세대(世代)가 구원(久遠)하여 묘소(墓所)를 실전(失傳)하고 오직 서원(書院)만을 모시어 오던 중 불행하게도 조선조 말(末) 고종(高宗) 8년(신미 1871) 서원(書院)이 모두 훼철(毀撤)을 당하여 사림(士林)과 후손(後孫)들이 그 위패(位牌)를 남원(南原) 중광원(重光原)에 봉안(奉安)하고 단(壇)을 설치(設置)하여 선조(先祖)의 유덕을 추모하여 왔다.
한편, 병부공(兵部公) 아래로 2세(二世) 공부랑중공(工部郎中公) 휘(諱) 득겸(得謙), 3세(三世) 병부의랑공(兵部議郎公) 휘(諱) 득황(得璜), 4세(四世) 이부전서공(吏部典書公) 휘(諱) 탁영(卓英), 5세(五世) 대제학공(大提學公) 휘(諱) 견(堅), 6세(六世) 첨의평리공(僉議評理公) 휘(諱) 이승(利升), 7세(七世) 태학사공(太學士公) 휘(諱) 충립(忠立), 8세(八世) 정당문학공(政堂文學公) 휘(諱) 당취(唐就), 9세(九世) 한림학사공(翰林學士公) 휘(諱) 준(俊) 등도 묘(墓)가 실전(失傳)되어 향화(香火)를 받들지 못하고 수백 년을 지내오던 중 마침내 경향 각지의 후손(後孫)들이 정성을 모아 1990년(庚午) 위 9대(九代) 열조(烈祖)의 단소(壇斤)를 남원(南原)에 설단(設壇)하고 중광원(重光原)을 예성(禮成)하여 매년(毎年) 음(陰) 10월 3일에 전국의 후손(後孫)들이 모여 향사(享祀)하고 있다.
병부공파(兵部公派)는 파조(派祖) 휘(諱) 능양(能讓)의 9세손(九世孫)으로 고려 충렬왕 1년(1275)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휘(諱) 준(俊)의 자(子)를 중심으로 크게 판사공계(判事公系)와 묵재공계(默齋公系)로 나누어지는데 이 중 고려 충숙왕 13년(1326)에 문과(文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봉익대부 판도판서 집현전 대제학을 지낸 묵재(默齋) 휘(諱) 우(祐)의 증손(曾孫) 문양공(文襄公) 휘(諱) 성지(誠之)의 업적이 가장 두드러지고 그 손(孫)이 번창하여 병부공파(兵部公派)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